"노동 경계 허물어져 기존 제도로 노동자 보호 못해"
첫 단독 저서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출간한 이승윤 교수 인터뷰
2018~2019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교환교수 자격으로 베를린에서 생활했던 이승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45)는 한국에 돌아온 뒤 깜짝 놀랐다. 식료품 ‘새벽 배송’ 광고를 보고 미심쩍은 마음에 시험삼아 주문을 했더니 다음날 새벽 실제로 주문한 물품이 문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료품들은 종류에 따라 보냉팩과 에어캡으로 빈틈없이 포장돼 있었다. 독일은 오전에 주문을 하면 다음날 오후에야 배달이 된다. 포장도 그냥 식료품을 종이 봉투에 넣는 수준이다.
2015년 100억원 규모에서 2023년 11조9000억원으로 빠르게 팽창한 새벽배송 시장의 이면에는 배달노동자들의 희생이 자리잡고 있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와 택배노조가 지난 9월 발표한 ‘택배노조 실태조사’에 따르면, 쿠팡 택배 노동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64.6시간에 달한다. 그럼에도 배달노동자들은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제도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외주화된 청소노동자, 콜센터 노동자, 하청노동자, 플랫폼노동자, 자영업자지만 자율성이 거의 없는 종속적 자영업자 등도 비슷한 처지다. 이처럼 겉으로는 독립적 자영업자나 프리랜서처럼 보이지만 기본적 노동권이나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새 유형의 노동이 확산하면서 우리 사회 노동문제는 기존의 틀로는 포착할 수 없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최근 출간된 이 교수의 첫 단독 저서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문학동네)은 한국 불안정노동의 복잡한 현실과 불안정노동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제도적 실패의 문제를 ‘액화노동’의 틀로 고찰한 책이다. 액화노동이란 비정규직과 플랫폼노동 종속적 자영업 등 비정형적이고 비표준적인 노동이 증가하며 기존의 정형화된 노동의 경계가 녹아내리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교수는 지난 10년 동안 불안정노동 연구로 국내외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지난 11일 중앙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제 연구를 꾸준히 지켜봐온 출판사가 5년쯤 전 출간 제의를 해왔다”면서 “논문으로 써온 내용들을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담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출간 제의를 받고도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노동조합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 소식을 듣고 노동 담론을 대중과 공유하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날 바로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1월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민주노총 본부, 보건의료노조 사무실, 건설노조, 한국노총 한국연합건설노조 사무실 등을 잇따라 압수수색했다.
책에 따르면 2020년 5월 기준 특수형태고용종사자의 16.84%만이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고 있다. 정규직은 고용보험 미가입률이 3.9%에 불과하지만 종속적 자영업자의 경우 국민연금 미가입자가 45%에 이른다. 책에서 이 교수는 이 같은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고용 계약 관계와 무관하게 취업자와 사업주 각각의 소득에 보험료를 부과하는 ‘소득보험 전략’을 도입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교수는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2022년 국무총리실 직속 청년정책조정위원회 초대 민간 부위원장을 맡아 문재인 정부 청년 정책 수립에 간여했다. 그는 “청와대뿐만 아니라 여당은 하루 빨리 성과로 내세울 만한 청년 정책을 찾는 듯했다”며 정치권의 조급증을 비판했다. 청년 일자리를 ‘세대’ 문제로 파악하려는 정치권의 접근은 더욱 경계해야 할 사항이다. ‘청년’으로 호명되는 집단 내부에는 “계급에 따라 상이한 이해관계”가 존재하는데, 세대에 초점을 맞출 경우 그와 같은 계급적 차이가 ‘세대 갈등’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희석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현 정부가 ‘기성 노동자들 때문에 연금 개혁을 못해 청년들이 힘들 수 있다’는 식으로 세대 갈등을 활용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아주 문제적”이라면서 “청년 정책이 거의 안 보인다”고 말했다.
빠르게 확산하는 불안정노동의 흐름에 제동을 걸기 위해 개별 시민들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이 교수는 “제도적인 개선 노력도 중요하지만 매일매일의 삶이 이렇게 운영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노동이 존재하고 있는지 인식하고 얘기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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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교환교수 자격으로 베를린에서 생활했던 이승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45)는 한국에 돌아온 뒤 깜짝 놀랐다. 식료품 ‘새벽 배송’ 광고를 보고 미심쩍은 마음에 시험삼아 주문을 했더니 다음날 새벽 실제로 주문한 물품이 문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료품들은 종류에 따라 보냉팩과 에어캡으로 빈틈없이 포장돼 있었다. 독일은 오전에 주문을 하면 다음날 오후에야 배달이 된다. 포장도 그냥 식료품을 종이 봉투에 넣는 수준이다.
2015년 100억원 규모에서 2023년 11조9000억원으로 빠르게 팽창한 새벽배송 시장의 이면에는 배달노동자들의 희생이 자리잡고 있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와 택배노조가 지난 9월 발표한 ‘택배노조 실태조사’에 따르면, 쿠팡 택배 노동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64.6시간에 달한다. 그럼에도 배달노동자들은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제도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외주화된 청소노동자, 콜센터 노동자, 하청노동자, 플랫폼노동자, 자영업자지만 자율성이 거의 없는 종속적 자영업자 등도 비슷한 처지다. 이처럼 겉으로는 독립적 자영업자나 프리랜서처럼 보이지만 기본적 노동권이나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새 유형의 노동이 확산하면서 우리 사회 노동문제는 기존의 틀로는 포착할 수 없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최근 출간된 이 교수의 첫 단독 저서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문학동네)은 한국 불안정노동의 복잡한 현실과 불안정노동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제도적 실패의 문제를 ‘액화노동’의 틀로 고찰한 책이다. 액화노동이란 비정규직과 플랫폼노동 종속적 자영업 등 비정형적이고 비표준적인 노동이 증가하며 기존의 정형화된 노동의 경계가 녹아내리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교수는 지난 10년 동안 불안정노동 연구로 국내외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지난 11일 중앙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제 연구를 꾸준히 지켜봐온 출판사가 5년쯤 전 출간 제의를 해왔다”면서 “논문으로 써온 내용들을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담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출간 제의를 받고도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노동조합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 소식을 듣고 노동 담론을 대중과 공유하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날 바로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1월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민주노총 본부, 보건의료노조 사무실, 건설노조, 한국노총 한국연합건설노조 사무실 등을 잇따라 압수수색했다.
책에 따르면 2020년 5월 기준 특수형태고용종사자의 16.84%만이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고 있다. 정규직은 고용보험 미가입률이 3.9%에 불과하지만 종속적 자영업자의 경우 국민연금 미가입자가 45%에 이른다. 책에서 이 교수는 이 같은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고용 계약 관계와 무관하게 취업자와 사업주 각각의 소득에 보험료를 부과하는 ‘소득보험 전략’을 도입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교수는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2022년 국무총리실 직속 청년정책조정위원회 초대 민간 부위원장을 맡아 문재인 정부 청년 정책 수립에 간여했다. 그는 “청와대뿐만 아니라 여당은 하루 빨리 성과로 내세울 만한 청년 정책을 찾는 듯했다”며 정치권의 조급증을 비판했다. 청년 일자리를 ‘세대’ 문제로 파악하려는 정치권의 접근은 더욱 경계해야 할 사항이다. ‘청년’으로 호명되는 집단 내부에는 “계급에 따라 상이한 이해관계”가 존재하는데, 세대에 초점을 맞출 경우 그와 같은 계급적 차이가 ‘세대 갈등’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희석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현 정부가 ‘기성 노동자들 때문에 연금 개혁을 못해 청년들이 힘들 수 있다’는 식으로 세대 갈등을 활용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아주 문제적”이라면서 “청년 정책이 거의 안 보인다”고 말했다.
빠르게 확산하는 불안정노동의 흐름에 제동을 걸기 위해 개별 시민들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이 교수는 “제도적인 개선 노력도 중요하지만 매일매일의 삶이 이렇게 운영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노동이 존재하고 있는지 인식하고 얘기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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