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연차'는 안녕한가요?
가전 설치·수리 노동자 73%가 연차를 절반도 사용하지 못 한 이유
[백남주 기자]
전국가전통신서비스노조가 지난 5월 국내 대표적인 정수기 업체 설치·수리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 한 설문조사(응답자 299명)에 따르면 1년에 주어진 연차를 절반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73.3%나 되었다.
이들은 왜 연차를 이렇게나 많이 사용하지 못 했을까?
연차가 너무 많아서? 물론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연차가 너무 많아 절반도 사용하지 못 하는 노동자가 있기나 할까.
우선, 사용하지 않은 연차에 대해 금액으로 보존해 주는 제도(연차수당)가 있기에 연차 사용을 많이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연차를 아껴 소득을 늘리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노동자의 응답은 다소 달랐다. 연차를 소진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동료에게 미안해서'가 32.0%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다음으로 '성과급의 감소'가 30.1%로 2위, '연차수당을 받기 위해서'가 26.5%로 3위를 차지했다.
'동료에게 미안해서' 연차를 소진하지 못 한다는 것은 인원 문제와 관련이 있다. 생활가전 설치·수리 기사의 경우 본인이 담당하는 구역과 물량이 있는데, 본인이 쉬는 경우 누군가는 이를 대신해 줘야 한다. 가전제품의 설치 혹은 수리를 기다리는 고객은 설치·수리 노동자의 개인 사정을 고려해 기다려 주진 않는다.
연차는 노동자의 권리로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사용해야 하는 제도가 아니다. 노동자의 휴식권을 보장하기 위해 회사는 특정 지역의 노동자가 쉬더라도 업무가 원활히 돌아갈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정인원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일 것이다.
'성과급 감소' 때문에 연차를 사용하지 못 하는 문제는 생활가전 설치·수리 노동자들의 임금구조와 관련이 있다.
생활가전 설치·수리 노동자의 임금은 기본급에 더해 특정 기준을 넘어서면 인센티브(성과급)가 발생하는 구조다. 예를 들어 한 달을 기준으로 100건의 설치·수리 건을 진행하면 101건부터 특정한 비율로 인센티브가 발생한다.
A 노동자가 11월 5일 아이의 초등학교 참관수업 때문에 쉬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고 하자. A 노동자는 100건이라는 기준을 달성하기 위한 일수가 하루 줄어들게 된다. 안 쉬고 일했으면 11월 20일까지 100건을 달성하고 21일부터는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지만, 100건을 달성하는 날이 11월 21일로 미뤄지는 것이다. 그만큼의 손실을 감내하며 쉬어야 한다. 연속적인 휴식은 감내해야 하는 손실을 더욱 크게 만든다.
근로기준법 제60조 1항은 "사용자는 1년간 80퍼센트 이상 출근한 근로자에게 15일의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라며 '연차 유급휴가'를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연차는 노동자에게 있어 대표적인 '휴식권' 중 하나이며 노동력을 유지·재생산하는 데 필수적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쉼 없이 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심리적·정신적 소진상태의 회복을 위해서도 쉬어야 한다. 소위 '번 아웃' 상태에서는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
또한 연차는 가족과의 시간, 사회적 활동의 시간을 확보하는 기능 역시 수행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가족·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가 자신의 노동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가족 간 크게 다툰 날과 즐거운 아침 식사를 함께 한 날의 노동을 상상해 보라. 연차는 단순한 체력 회복을 넘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기능 회복의 역할도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사(사용자)에게 노동자의 온전한 휴식권을 위해 연차를 유급으로 보장하는 의무를 지우는 것은 타당하다.
그런데 이러한 연차가 유급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한국의 현실에 비춰보면 아마 상당수 노동자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휴식을 포기하고 일터로 나갈 것이다. 병가의 경우 현재 법적으로는 유급이 보장되지 않는데, 이는 아파도 제대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휴식과 소득 상실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유급휴가'의 문제는 노무제공자의 경우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최근 택배기사나 배달 라이더의 과로사 문제가 계속 불거지고 있다. 이들은 사용자의 지휘·통제로부터 자유롭다고 하는 노무제공자인데 왜 과로사가 끊이지 않을까? 배달라이더의 경우 웹 접속을 중단하고 쉬면 그만 아닌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하루 일을 쉬는 순간 그만큼의 소득 감소를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득이 감소함을 아는 순간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 힘들다.
따라서 앞선 생활가전 설치·수리 노동자의 경우도 연차 사용이 소득 상실로 이러지는 고리를 차단해야 한다. 연차 사용 횟수에 따라 인센티브가 발생하는 기준(위 예에서는 100건)을 조정해 주는 제도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쉼, 휴식의 가치가 중요해 지고 있다. 최장 시간 노동 국가의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 노동시간을 줄여나가는 것이 사회적 과제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쉼을 방해하는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사회적으로도, 기업 차원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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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주 기자]
전국가전통신서비스노조가 지난 5월 국내 대표적인 정수기 업체 설치·수리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 한 설문조사(응답자 299명)에 따르면 1년에 주어진 연차를 절반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73.3%나 되었다.
이들은 왜 연차를 이렇게나 많이 사용하지 못 했을까?
연차가 너무 많아서? 물론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연차가 너무 많아 절반도 사용하지 못 하는 노동자가 있기나 할까.
우선, 사용하지 않은 연차에 대해 금액으로 보존해 주는 제도(연차수당)가 있기에 연차 사용을 많이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연차를 아껴 소득을 늘리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노동자의 응답은 다소 달랐다. 연차를 소진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동료에게 미안해서'가 32.0%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다음으로 '성과급의 감소'가 30.1%로 2위, '연차수당을 받기 위해서'가 26.5%로 3위를 차지했다.
▲ 연차를 소진하지 못한 이유 A사 설치수리 노동자를 대상으로 '연차를 소진하지 못한 이유'를 물은 결과 '동료에게 미안해서'와 '성과급의 감소'를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했다. |
ⓒ 서비스연맹 |
'동료에게 미안해서' 연차를 소진하지 못 한다는 것은 인원 문제와 관련이 있다. 생활가전 설치·수리 기사의 경우 본인이 담당하는 구역과 물량이 있는데, 본인이 쉬는 경우 누군가는 이를 대신해 줘야 한다. 가전제품의 설치 혹은 수리를 기다리는 고객은 설치·수리 노동자의 개인 사정을 고려해 기다려 주진 않는다.
연차는 노동자의 권리로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사용해야 하는 제도가 아니다. 노동자의 휴식권을 보장하기 위해 회사는 특정 지역의 노동자가 쉬더라도 업무가 원활히 돌아갈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정인원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일 것이다.
▲ 지난 11월 9일 노동자 대회에 참가한 설치수리 노동자가 적정인원 충원을 요구하고 있다. |
ⓒ 서비스연맹 |
'성과급 감소' 때문에 연차를 사용하지 못 하는 문제는 생활가전 설치·수리 노동자들의 임금구조와 관련이 있다.
생활가전 설치·수리 노동자의 임금은 기본급에 더해 특정 기준을 넘어서면 인센티브(성과급)가 발생하는 구조다. 예를 들어 한 달을 기준으로 100건의 설치·수리 건을 진행하면 101건부터 특정한 비율로 인센티브가 발생한다.
A 노동자가 11월 5일 아이의 초등학교 참관수업 때문에 쉬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고 하자. A 노동자는 100건이라는 기준을 달성하기 위한 일수가 하루 줄어들게 된다. 안 쉬고 일했으면 11월 20일까지 100건을 달성하고 21일부터는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지만, 100건을 달성하는 날이 11월 21일로 미뤄지는 것이다. 그만큼의 손실을 감내하며 쉬어야 한다. 연속적인 휴식은 감내해야 하는 손실을 더욱 크게 만든다.
근로기준법 제60조 1항은 "사용자는 1년간 80퍼센트 이상 출근한 근로자에게 15일의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라며 '연차 유급휴가'를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연차는 노동자에게 있어 대표적인 '휴식권' 중 하나이며 노동력을 유지·재생산하는 데 필수적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쉼 없이 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심리적·정신적 소진상태의 회복을 위해서도 쉬어야 한다. 소위 '번 아웃' 상태에서는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
또한 연차는 가족과의 시간, 사회적 활동의 시간을 확보하는 기능 역시 수행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가족·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가 자신의 노동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가족 간 크게 다툰 날과 즐거운 아침 식사를 함께 한 날의 노동을 상상해 보라. 연차는 단순한 체력 회복을 넘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기능 회복의 역할도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사(사용자)에게 노동자의 온전한 휴식권을 위해 연차를 유급으로 보장하는 의무를 지우는 것은 타당하다.
그런데 이러한 연차가 유급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한국의 현실에 비춰보면 아마 상당수 노동자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휴식을 포기하고 일터로 나갈 것이다. 병가의 경우 현재 법적으로는 유급이 보장되지 않는데, 이는 아파도 제대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휴식과 소득 상실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유급휴가'의 문제는 노무제공자의 경우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최근 택배기사나 배달 라이더의 과로사 문제가 계속 불거지고 있다. 이들은 사용자의 지휘·통제로부터 자유롭다고 하는 노무제공자인데 왜 과로사가 끊이지 않을까? 배달라이더의 경우 웹 접속을 중단하고 쉬면 그만 아닌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하루 일을 쉬는 순간 그만큼의 소득 감소를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득이 감소함을 아는 순간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 힘들다.
따라서 앞선 생활가전 설치·수리 노동자의 경우도 연차 사용이 소득 상실로 이러지는 고리를 차단해야 한다. 연차 사용 횟수에 따라 인센티브가 발생하는 기준(위 예에서는 100건)을 조정해 주는 제도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쉼, 휴식의 가치가 중요해 지고 있다. 최장 시간 노동 국가의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 노동시간을 줄여나가는 것이 사회적 과제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쉼을 방해하는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사회적으로도, 기업 차원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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