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롯데] ① 신격호의 무차입 경영이 30조원 차입금으로 불어나기까지
껌 장사로 시작해 일본 시장을 제패한 뒤 IMF를 지나 국내 재계 5위라는 금자탑을 쌓은 롯데. 이는 2022년까지 이야기다. 그런 롯데그룹이 최근 위기설에 휘청이고 있다. 이 위기설의 진원지를 짚어본다.
지난 21일 롯데그룹은 '현재 부동산 가치와 가용예금만 71조4000억원에 달하며 안정적인 유동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설명자료를 배포했다. 롯데 측은 "지난달 기준 총자산은 139조원, 보유주식 가치는 37조5000억원에 이른다"며 "부동산 가치는 56조원, 즉시 활용 가능한 예금은 15조4000억원"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롯데를 둘러싼 '유동성 위기설'로 주요 상장사의 주가가 급락하고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적극적으로 진화에 나선 것이다. 증권가에서는 롯데의 유동성 위기설에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지만, 실적부진과 차입금 증가로 그룹이 불안정해진 점은 부인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롯데는 재계 순위 5위를 약 12년간 유지했지만 지난해 6위로 밀려났다.
신격호 명예회장의 '무차입 경영'
현재 롯데의 상황은 신 명예회장이 강조했던 경영철학과 다르다. 신 명예회장은 평생 무차입 경영을 원칙으로 삼고 재무안정성과 내실을 강조했다. 그는 빚을 최소화하고 자생적 성장을 통해 기업의 기반을 다졌다.
1921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난 신 명예회장은 19세 때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생계를 위해 신문과 우유 배달을 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1946년 화장품제조업을 시작으로 경영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껌 사업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일본 시장에서 천연 치클을 사용한 고품질 껌으로 성공을 거뒀다. 이를 기반으로 1948년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하고 초콜릿, 캔디류, 빙과류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 일본 최대 제과 업체로 성장했다.
이후 그가 세우거나 인수한 회사도 기존 사업과 확실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곳 위주였다. 과자와 음료 포장에 필요한 자재를 생산하기 위해 1970년 동방알미늄(현 롯데알미늄)을 인수했고 이후 롯데칠성음료(1974년), 롯데삼강(1978년)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79년 호텔롯데와 롯데쇼핑센터를 건설해 서울의 랜드마크로 만든 데 이어 1980년대에는 대홍기획, 롯데자이언츠, 롯데월드 등 유통과 문화를 아우르는 사업으로 '유통거인'의 입지를 확립했다.
신 명예회장의 무차입 경영 원칙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빛을 발했다. 1997년 롯데그룹이 경제적 혼란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기업으로 자리를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30대그룹 중 19곳(63%)이 순위권에서 이탈하거나 사라지는 등 경제위기의 여파가 컸지만, 신 명예회장의 원칙 덕분에 롯데는 타격을 피했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아 그룹의 역량을 키웠다. 재계 순위 11위였던 롯데는 1998년 이후 20년간 지속 성장하며 5위까지 올랐다. 롯데는 지난해 기준 6위(자산총액 129조8290억원)로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신동빈 회장의 '차입경영'
그러나 이 같은 차입경영이 롯데그룹의 재무부담으로 작용했다. 증권 업계에 따르면 롯데지주·호텔롯데·롯데케미칼 등 주요 계열사 3곳의 총차입금은 올 상반기 기준 29조9509억원으로 30조원에 육박했다. 특히 롯데케미칼의 경우 차입금이 6조8000억원에서 9조7000억원으로 급증했다.
신 회장은 2011년 그룹 회장에 오른 뒤 공격적인 M&A로 외형확장을 추구해왔다. 2004년부터 그룹 정책본부장을 맡아 롯데홈쇼핑, 롯데주류 등 굵직한 M&A를 주도한 경험이 있다. 이후에도 바이더웨이(2740억원·2010년), GS백화점·마트(1조3400억원·2010년), 하이마트(1조2480억원·2012년) 등 다양한 M&A를 진행했다. 최근에는 일진머티리얼즈(2조7000억원·2021년), 한국미니스톱(3134억원·2021년), 한샘(2995억원·2021년), 중고나라(300억원·2021년) 등을 인수하거나 투자하며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M&A의 성과가 가시화하지 않으면서 차입 부담이 커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 확장을 목표로 한 신 회장의 차입경영이 오히려 롯데의 재무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미니스톱을 인수한 코리아세븐은 저수익 점포를 구조조정했음에도 올 3분기 87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적자전환했다. 또 한샘은 IMM PE와 롯데에 인수된 2021년 당시 692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으나, 이듬해 216억원의 영업손실로 돌아서 창사 이래 첫 적자를 냈다. 지난해 흑자전환했지만 신 회장이 기대한 실적 상승에는 크게 못 미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롯데가 2012년 인수한 하이마트는 초기에는 안정적인 수익원이었지만 온라인 시장이 성장하며 저가제품은 쿠팡, 고급가전은 백화점으로 수요가 이동해 입지가 크게 약화됐다. 매출은 2020년 4조517억원에서 2023년 2조6101억원으로 급감했고, 시장점유율도 29.1%까지 하락했다. 최근 불황까지 겹치자 하이마트는 구조조정과 점포 축소에도 불구하고 실적회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롯데가 300억원을 투자한 중고거래 플랫폼 '중고나라'도 당근마켓 등 경쟁 플랫폼의 부상과 차별화 부족으로 2021년 이후 해마다 적자를 기록하며 수익성 개선에 실패했다. 롯데는 물류·유통 인프라를 활용해 성장을 도모했으나 기대만큼의 시너지를 내지 못했다.
저성장 계열사의 구조조정 시기를 놓친 것 또한 롯데 위기의 주요 원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신 회장은 올 1월 말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성장성이 낮은 계열사는 선택과 집중을 위해 매각할 것"이라며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예고했지만, 현재까지 매각이 진행된 적은 없으며 일부 주요 계열사의 희망퇴직 수준에 그쳤다. 한 재계 관계자는 "연이은 M&A 실패와 함께 구조조정의 적기를 놓친 점은 롯데의 장기적 지속 가능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이제는 선언적 의지를 넘어 실질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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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기자 yrlee@blo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