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처럼 뛰고 있어" 로켓 배송 후 네 남매 두고 떠난 아빠…'청문회 촉구'
쿠팡 배송기사 산재 인정, 기쁨보다 죄인 된 심정
아빠 떠난 자리 아이들 ‘치유와 회복’ 우선
소중한 생명, 더는 희생되지 않아야
아빠 떠난 자리 아이들 ‘치유와 회복’ 우선
소중한 생명, 더는 희생되지 않아야
“저도 아이들 아빠에게 이런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사회 문제나 노동자들의 고통에 무관심했습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지요. 하지만 막상 제가 당사자가 되고 보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깨닫게 됐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아이 아빠를 단지 비극으로만 기억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변화를 이루기 위한 작은 시작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계시지 않았다면 이 시간을 버티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최근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만난 고 정슬기씨의 아내 A씨는 “용기를 내어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자신이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이 반복되고 또 다른 죽음의 행렬이 이어질 것임을 알기에 “침묵하거나 묵인할 수 없었다”며 인터뷰에 나선 이유를 밝혔다.
정슬기 씨와 A씨는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정씨는 피아노, A씨는 오르간 반주를 맡고 있었다. 유쾌하고 음악적 재능이 풍부했던 정씨와 3년간 교제한 끝에 A씨는 2011년 결혼했다. 슬하에 4명의 아이를 둔 A씨는 “남편은 가정에 늘 성실하고 든든한 버팀목 같은 사람이었다. 육아로 지친 나를 대신해 설거지를 도맡았고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의지가 되는 따뜻한 아빠였다”고 회상했다.
죽음을 부르는 로켓 배송의 그림자
지난해 3월 A씨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가장이었던 정씨는 생계를 위해 서둘러 일을 구했고 1톤 트럭만 있으면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쿠팡에서 일하게 됐다.
정씨는 쿠팡의 배송 전문 자회사인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 남양주2캠프 굿로지스대리점에서 퀵플렉스 근로자로 일했다. 퀵플렉스는 1톤 트럭을 보유하고 배송 건당 수수료를 받는 특수고용직으로 쿠팡의 간접고용 형태의 배송기사다.
정씨는 매일 오후 8시30분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주 6일, 평균 63시간을 근무했다. 야간 할증을 적용하면 주 평균 노동시간은 77시간에 이르며 산재 기준인 주 60시간을 크게 초과했다. 한 달에 고작 4일만 쉬며 건강이 급격히 악화했고 체중은 10㎏줄었다. 일반 기사들이 하루 1회 배송을 하는 것과 달리 그는 남양주 캠프와 서울 중랑구 배송지를 하루 3회 왕복하며 약100㎞를 이동하는 강도 높은 배송을 이어갔다.
A씨는 “남편이 밤마다 짐을 나르다 계단에 부딪히거나 미끄러지는 일이 잦아 몸에 멍이 자주 들었다. 내가 걱정하면 남편은 ‘다들 이렇게 일해 괜찮아’라고 말했다. 지금 와서 가장 후회되는 건 그 말을 그대로 믿었던 내 자신”이라고 말했다.
올해 초 대리점이 일방적으로 수수료도 인상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배송 건당 1000원을 받는 구조에서 수수료율이 0.5%에서 0.7%로 인상됐다”며 “그때도 남편은 ‘어쩔수 없이 그냥 이렇게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고 전했다.
쿠팡CLS와 배송 위탁업체는 당일 밤 12시 이전에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배송을 완료해야 하는 PDD(Promised Delivery Date) 계약을 맺는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위탁 계약이 해지되거나 배송구역을 회수당할 수 있는데 쿠팡 배송 기사들은 이 같은 상황을 두고 “클렌징 당했다”고 표현한다.
정씨 역시 클렌징 제도의 강압 속에서 끊임없는 압박을 받으며 일해야 했다. A씨는 “남편은 동료와 2인 1조로 두 구역 배송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날 집에 와서 배송 지역(라우트)이 바뀌었다고 하길래 이유를 물으니 동료가 갑자기 그만둬서 그 구역까지 맡게 됐다고 했다”고 말했다.
“사람을 대체하는 일도 기사들의 몫이었습니다. 물량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남편은 오전 7시까지 배송을 마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존 남편의 구역에 더해 떠난 동료의 구역까지 떠안으며 도저히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씨가 쿠팡CLS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받은 카카오톡 대화 내용도 공개했다. 쿠팡CLS 직원이 “슬기님 6시 전에는 끝나실까요. ○○님(동료 배송기사) 어마어마하게 남았네요”라고 하자 정씨은 “최대한 하고 있어요. 아파트라 빨리 안되네요”라고 답했다. 이에 직원이 “네 부탁드립니다 달려주십쇼”라고 메시지를 보내자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라고 답했다.
A씨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개처럼 뛰고 있다”는 말보다 직원과의 대화 끝에 남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이었다.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버텼을 남편의 모습이 떠올라 그 한마디가 더욱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고 했다.
또한 일부 계약서에서 남편이 평소 사용하던 필체와 전혀 다른 서명이 발견됐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남편이 직접 서명하지 않은 계약서라면 누군가 대리로 서명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대리 서명이 남편에게 불리한 조건을 강요하는 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피해를 막기 위해선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해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빠가 우리 곁을 떠난 '그날'
일주일에 하루뿐인 아빠의 휴일은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었다. 아이들과 놀아준 뒤에도 정 씨는 다음 날 일할 때 신체 리듬이 깨질까 걱정돼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지난 5월 28일, 그날도 아빠의 휴일이었다. A씨가 막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갔고, 하교 후 아빠와 놀 생각에 들떠 집으로 달려온 아이들은 거실에 쓰러져 있는 아빠를 발견했다. 아이들은 다급히 119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구급대의 30분 넘는 심폐소생술에도 깨어나지 못했다.
병원 도착 10분 만에 사망 판정을 받았다. 병원에서 밝힌 고인의 사인은 심실세동과 심근경색 의증으로 대표적 과로사 원인인 뇌심혈관계 질환 중 하나이다.
정씨의 부모는 방글라데시에서 10년째 사역 중인 평신도 선교사다. 수도 다카에서 약 250㎞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며 어린이들을 위해 사역 중이던 정금석 장로 부부는 지난 5월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A씨는 “장례식장에서 어머니가 처음 하신 말씀이 ‘거역하지 말자’였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말고 온전히 받아들이자고 하셨어요. 아버님은 아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더니 아들에게 ‘잘 가라’는 한마디를 남기셨어요. 저도 아이가 넷이지만 과연 저렇게 담대하게 아들을 떠나보낼 수 있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아직은 그분의 온전한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 가족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이 시간을 버티는 것이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가족들은 배달된 쌀 20㎏을 발견했다. 이는 정씨가 가족들을 위해 생전에 마지막으로 주문해 둔 것이었다.
쿠팡 과로사 방지책, 쿠팡 청문회 개최 촉구
정 장로는 “장례를 치른 후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깊은 슬픔 속에서 한 달간 애도의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한 힘은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살아가야 할 며느리와 네 명의 손주들이었다.
장례식 후 만난 대리점주는 “산재를 신청하면 대리점 소속 노동자들이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며 “어차피 산재는 인정받기 어려우니 1억 5000만 원을 받고 합의하자”고 회유했다. 대리점주의 태도에 깊은 실망과 분노를 느낀 정 장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소중한 생명들이 더는 헛되이 희생되지 않도록, 아들의 몫까지 살아가며 진실을 밝히겠다”고 결심하며 행동에 나섰다.
그는 지난 7월 근로복지공단 남양주지사에 산재 신청을 한 데 이어 9월에는 시민사회 단체 14곳과 기독교 단체들과 함께 서울 잠실 쿠팡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쿠팡 노동자 정슬기님을 지지하는 기독교 및 시민사회 대책위원회’를 출범했다.
그리고 지난 10일 대책위는 정씨의 과로사가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업재해로 인정됐다고 밝혔다. 공단은 정씨의 심근경색 의
증이 쿠팡CLS 업무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했다.
A씨는 “산재 승인을 받았을 때 기쁘기보다 ‘정말 내 남편이 일하다 죽었구나’라는 생각에 죄인된 심정이었다”며 “그럼에도 산재 승인은 가장을 잃은 우리 가정에 한줄기 빛과 같다. 남편의 사례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책위는 “이번 산재 인정을 통해 쿠팡의 로켓배송 시스템이 과로사를 유발했음을 시사한다”며 유족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책 마련을 촉구했다.
공교롭게도 정씨가 산재 처리를 받은 날, 정종철 쿠팡풀필먼트서비스 대표와 홍용준 쿠팡CLS 대표가 국정감사에 출석했다. 홍 대표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고인과 유가족에게 사과했지만, 사실상 해고제도로 불리는 배송구역 회수제도(클렌징) 폐지에는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정 장로는 쿠팡의 책임을 규명하고 노동 현장의 실질적 변화를 이끌기 위해 쿠팡에서 숨진 노동자 3명의 유가족들과 함께 국민동의 청원을 발의했다. 이 청원은 이달 7일 5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청문회 개최 요건을 충족했다. 그러나 국회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다.
정 장로와 유가족들은 지난 12일 애타는 마음으로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 장로는 이 자리에서 “쿠팡과 관련있는 국토교통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정무위원회가 합동 청문회를 열어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하고 가족들과 작은 행복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며 “다시는 저희처럼 무너지는 가정이 생기지 않도록 해 달라”라고 호소했다.
"더는 고귀한 목숨이 희생되지 않기를..."
“엄마, 학교 친구들이 우리 아빠가 로켓에 연료가 됐대. 그게 무슨 말이야?”
A씨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아빠를 이렇게 기억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인터넷에서 아빠 이야기를 접하게 될 텐데 ‘엄마는 그때 뭐 했어?’라고 물을까 봐 그게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는 아빠를 잃은 충격으로 다시 기저귀를 차게 됐다. A씨는 “지금은 아이들의 치유와 회복이 우선이고 든든한 엄마가 되는 것이 내 역할”이라며 “그래야 천국에서 아이들 아빠를 만나도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편 정슬기씨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오빠 보물 같은 네 아이를 선물로 남겨줘서 정말 고마워. 지금 우리 아이들이 아니었으면 훨씬 더 힘들었을 거야. 아이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 건강하게 자라서 바른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엄마로서 지지하고 아껴주고 사랑하며 키울게. 다른 노동자들이 더는 당신처럼 희생되지 않도록 당신도 하늘에서 도와줘.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면 못다 한 이야기 많이 나누자. 그리고 내가 가면 꼭 마중 나와줘야 해. 많이 사랑하고 정말 보고 싶어.”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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