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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 음식 없으면 밥 굶을 '모던 주부'

1920년대 자전거 음식배달 성행...설렁탕, 냉면이 인기 메뉴

최멍텅이 설렁탕 그릇을 수북이 쌓은 쟁반을 들고 한 손으로 자전거를 몰고 있다. 자전거 음식 배달은 1920년대 흔한 풍경이었다. 한여름에도 설렁탕 배달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일보 1925년 8월19일자 '멍텅구리' 자급자족 62회.산수화가로 이름난 노수현 화백이 그렸다.

자기 손으로 돈 벌어 자립하겠다고 나선 ‘멍텅구리’ 주인공 최멍텅. 자전거로 설렁탕을 배달하는 음식점 배달부로 취직한다. 설렁탕 배달에 나섰다가 그만 수레와 부딪쳐 그릇을 몽땅 깨뜨렸다. 홧김에 수레를 뒤집어버렸으나 이번엔 순사에게 교통 방해죄로 쫓긴다. 자전거를 개천에 버리고 도망간 최멍텅은 주인에게 경을 치고 또 쫓겨나는 해프닝이다.(만화보기 https://archive.chosun.com/cartoon/mtguri/mt2_content_wide.jsp?tid=mt130060001&tno=A)

◇1920년대 유행한 음식 배달 서비스

1920년대엔 아직 신분이나 남녀 구분없이 한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게 익숙지않았다. 일부 양반계층이나 모던 보이, 모던 걸은 설렁탕이나 냉면을 먹고 싶어도 음식점에 가서 먹는 걸 꺼렸다. 식당들은 이런 손님들을 위해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배달의 민족, 쿠팡 잇츠처럼 전화로 음식을 주문하면, 집까지 배달해줬다. 설렁탕, 냉면이 인기였다. 간편하면서도 대중적인 메뉴였기 때문일 것이다. 설렁탕은 한 그릇에 10~15전, 냉면은 이보다 5전정도 비싼 15~20전 정도했다.


◇ ‘하이카라 부부’의 아침식사, 배달 설렁탕

서울을 대표하는 음식인 설렁탕은 모던 부부들도 즐겼다. 아침 식사로 설렁탕을 배달시켜 먹기도 했다. ‘신가정을 이루는 사람은 하루에 설렁탕 두그릇을 먹는다고 합니다. 돈은 넉넉지 못한데다가 아침에 늦잠을 자고 나니 속은 쓰리지만은 찬물에 손넣기가 싫으니까 손쉽게 설렁탕을 주문한답니다.’ 대중잡지 ‘별건곤’ 1929년12월호는 막 결혼했거나 가정부를 둘 처지가 안된 신여성들이 간편한 아침 식사로 설렁탕을 즐긴다고 소개했다.

모던 부부는 오후 늦게 손을 마주 잡고 거리나 공원으로 산보를 다닌다면서 ‘저녁 늦게나 집에 들어가게 되니까 어느 틈에 밥을 지어먹을 수없고 또 손쉽게 설렁탕을 사다 먹는다’고 썼다. 아침은 배달, 저녁은 ‘테이크 아웃’ 설렁탕으로 두끼 식사를 해결한다는 얘기다. 이 잡지는 ‘근래에 소위 신식 혼인을 했다는 하이카라 청년들도 이 설렁탕이 아니면 조석을 굶을 지경’이라고 썼다.

자전거 배달이 많다보니, 교통 사고도 심심찮게 났다. 자동차나 전차와 부딪치거나 사람을 치어 다치게 하기도 했다. 최멍텅이 손수레와 충돌하는 사고를 낸 것도 당시 종종 일어난 일이었다.

산더미처럼 많은 음식을 한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자전거를 모는 음식 배달부. 길을 지나던 귀부인이 깜짝 놀란다. 석영 안석주의 만문만화. 조선일보 1934년4월30일

◇석영 안석주의 음식배달부 만화

‘귀부인’이 산더미처럼 많은 음식을 자전거로 배달하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란다. “애고머니 저 무거운 것을 한 손으로 저렇게…” 배달부는 도리어 이렇게 대꾸한다. “당신 머리에 꽂은 것과 손에 낀 것이 더 무겁겠쇼. 제길, 어느 놈은 돈지랄로 저렇게, 어느 놈은 이 지랄을 하고도 마누라 구리 반지 하나 못사준담!”(조선일보 1934년 4월30일) 만문만화가 석영 안석주가 머리 장식과 반지로 치장한 부인과 음식배달부를 대비시켜 풍자했다. 자전거 음식 배달 서비스가 꽤 흔한 풍경이었음을 알 수있다.

◇ ‘한국 만화사의 기념비적 작품’

1924년 10월13일 탄생한 국내 신문 최초의 네컷 연재만화 ‘멍텅구리’는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1924년 9월 조선일보를 인수해 이상재 사장을 추대하며 야심차게 내놓은 ‘혁신 조선일보’의 기획이다. ‘멍텅구리’란 말이 유행어로 떠오르고, 1926년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멍텅구리’ 영화가 만들어질 만큼 인기를 누렸다. ‘한국 만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다.

미국 유학파 언론인 김동성(발행인)이 기획하고, 당시 신문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상협(편집고문)과 민세 안재홍(주필)이 스토리 구성을 맡았다. 산수화 대가인 심전(心田) 안중식의 양대 제자인 심산 노수현과 청전 이상범이 만화를 그렸다. 노수현과 이상범은 한국화를 정통으로 배운 예술인들이었다. 노수현은 광복 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내며 후학을 길렀고, 이상범 역시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 작가로 떠올랐다.

◇멍텅과 옥매의 줄다리기

‘멍텅구리’는 충청도 부농 아들인 키다리 최멍텅과 그 친구인 땅딸보 윤바람이 평양 출신 기생 신옥매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에피소드가 중심이다. ‘멍텅구리’는 1924년 10월13일 시작, 1927년 8월20일까지 연재됐고, 1933년2월 26일 재등장, 그해 8월2일까지 연재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만화는 모두 744편, ‘헛물켜기’ ‘연애생활’ ‘자작자급’ ‘가정생활’, ‘세계일주, ‘꺼떡대기’, ‘가난사리(살이)’, ‘사회사업’, ‘학창생활’, ‘또나왔소’ ‘모던 생활’ ‘기자생활’ 등 시리즈 12편이다.

<멍텅구리 만화 보러가기 https://archive.chosun.com/cartoon/toon_comic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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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kichul@chosun.com